복싱 칼럼을 연재한지 어느덧 4년여가 흘러간다.
글이란 것은 모름지기 마음속에 진실함이 담겨 있어야 되고 열정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글쓰기가 복싱과 공통점은 그 업에 몰입하고 미치고 매진해야만 살아 남을수 있다는 점이다.
글이란 것은 모름지기 마음속에 진실함이 담겨 있어야 되고 열정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글쓰기가 복싱과 공통점은 그 업에 몰입하고 미치고 매진해야만 살아 남을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적당히 글을 쓰면 적당한 평가를 받는 점도 복싱과 같은 이치다. 글을 써가는 과정을 즐기고 다시 읽어보면서 내자신이 희열과 감동을 받아야만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 될것이라 는 확신을 가지고 이번주 복싱 비화를 시작해본다.
94년 이른 봄 어느 날 로 기억된다. 저녁10시가 좀 넘었을까... 술이 거나하게 취한 한 녀석이 내가 근무하는 영등포 체육관에 왔다. 어떻게 왔냐는 물음에 대뜸 "사범님 내가 누군줄 압니까? 천하에 최용수(당시 동양챔피언)를 2회 KO로 꺽은 복서가 바로 납니다" 라며 다소 기고만장하게 말한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IBF 주니어 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동아체육관 정종관(60년 함평) 과 88년 7월 맞대결을 펼쳐 복부와 안면을 수차례 난타당한 끝에 5회 KO패 당한후 링을 떠난 장성관(68년.원진체)이란 복서였다. 그런 그가 3년4개월 만에 재기전에서 최용수와 맞붙어 2회 KO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최용수(72년 당진)는 이후 18연승 10KO승(1무포함)을 질주하며 95년 WBA 주니어 라이트급 세계정상에 등극 7차방어에 성공하며 명복서 반열에 올라섰지만, 장성관은 임광복에 무승부를 기록하고 5승(3ko승) 3무3패를 기록한체 92년 복싱을 접었다는 사실이다.
칼럼을 연재하면서 느낀점은 성공한 복서들의 과거 이력을 펼쳐보면 얼룩으로 점철된 면이 많은걸 알수있고, 실패한 복서들의 과거를 훍어보면 의외로 화려한 경력이 많음을 알수 있다. 장성관의 경우처럼 복싱 경기를 관전하다보면 언더독이 탑독을 잡는 경우가 왕왕 발생 한다.
79년 4월 경남 도민체전에 울산대표로 출전한 한국복싱을 대표하는 슈퍼스타 장정구(62년 부산 극동)가 진주대표인 김평국(61년.경상대)과 맞대결해 패하는 이변도 발생했고, 83년 세계청소년 대회 선발전 코크급 준결승에서 유원건설의 김용강도 신명수(원주 대성고)에게 완패하는 이변도 일어났다.
또한 강영한( 56생.군산 한길 관광소속) 이라는 복서는 안달호(일우공영)와 김의진(군산대) 에게 4연패를 당했지만,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금메달 리스트인 홍기호(서원대)와 이해정(한국체대)을 각각 판정으로 잡으며 스타복서 킬러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유명복서와 거리가 먼 나도 85년 6월 프로에서 7전 전승 을 거둔후 8전쩨에 중앙체육관의 10전 2승2무6패를 기록한 곽승현에게 한차례 다운을 당하는 등 정신없이 얻어터진 끝에 판정패를 당한 쓰라린 기억이 있다.
오늘 소개할 복서는 유명복서 킬러로 명성을 떨쳤던 현 부산복싱협회 심판 위원장에 재직하고 있는 장상기 선배다. 장상기는 1959년 부산태생 이다. 그는 78년 국제복싱 주종찬 관장 문하에서 복싱을 수련한다. 국제복싱 주종찬 관장은 페더급에서 이창길·김현치 ·이청하 등 역대급 복서들과 자웅을 겨룬 명복서 였고, 특히 수원대 감독을 지낸 곽일선을 RSC로 잡은 베테랑 복서출신이다.
이분은 부산 광무체육관에서 사범을 거쳐 78년 국제 체육관 관장을 지내면서 김치복·이장수·이흥수·이태동·박동식·최진석 둥 명망있는 복서들을 다수 베출했다.
이 체육관 출신의 장상기는 선천적으로 기골이 장대한 중량급 복서로 79년부터 중앙무대에서 활약하게 된다. 그해 5월 제32회 전국 신인대회에서 라이트 헤비급 결승에서 후에 동양챔피언에 등극하는 이수항(59년.남양주)을 2회 RSC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한후 11월 요꼬하마 세계 청소년대회 에선 헤비급으로 출전 결승까지 치고 올라가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헤비급 동메달 리스트인 소배원(이리상고)에게 접전 끝에 판정으로 패한다.
주목할 만한점은 장상기는 당시 동원환경 이라는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취미활동으로 복싱을 수련하는 평범한 복서였다는 사실이다. 야구로 말하면 직장인 야구단에 소속된 선수가 프로야구 구단에 입단하여 정상급 선수들과 대등한 경기력을 보이며 활약한 것이다.
그와 복싱을 함께 수련하면서 부산대표로 전국체전을 함께 출전했던 동료 복서 이자 챔피언 체육관 최진석 관장은 장상기의 복싱은 중량급 답지 않게 리듬을 타면서 임기응변으로 복싱을 구사했던 클레버 복서라고 말하며, 당시 어려웠던 그시절 장상기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받은 월급으로 동료들에게 많이 베풀고 나누며 지낸 정감있는 동료라고 말한다.
각설하고 장상기는 국내 정상급 복서들과 맞대결에서 수준높은 경기를 보여줬다. 80년 부산 전북 대표선발전 라이트 헤비급 경기에서 정부 수립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인 남원농고 신준섭 과 맞대결을 비롯해,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과 80년 모스크바올림픽 미들급 국가대표로 선발된 극강의 조용래, 7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이남의 79년 세계청소년대회 동메달 장한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헤비급의 지존 우광식을 꺾은 김창준(원주복싱), 79년 청소년대표 출신에 82년 김명복배 금메달 리스트로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국가대표 김현호와 초접전을 벌인 이창근(한국체대) 등과 맞대결을 벌여 3승을 들어 올리는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이런 장상기도 84년 라이트 헤비급으로 출전한 LA올림픽 2차선발전 준결승에서 탈락하자 체계적으로 훈련하는 엘리트복싱에 맞선 생활복싱의 한계를 절감하고, 이듬해 전국체전을 끝으로 복서 생활을 접는다.
하지만 그는 악조건 속에서도 비록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못했지만 전국대회 3회우승의 금자탑 을 쌓을수 있어 자랑스럽다고 소회를 밝혔다.
하지만 그는 악조건 속에서도 비록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못했지만 전국대회 3회우승의 금자탑 을 쌓을수 있어 자랑스럽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한 그는 79년도 부산대표로 전국체전 합숙훈련때 장정구가 국가대표 장흥민에 밀려 본선에 출전하지 못하고 씁쓰름한 표정으로 짐을꾸려 나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회상하며 당시, 장정구는 한마디로 독종 그자체라 할만큼 근성과 투지가 뛰어난 복서라고 말한다.
장상기는 당시 근무했던 (주)동원환경 에서 현재는 상무로 재직하면서 부산복싱 협회 부회장을 7년을 재임하다 3년전부터 부산 복싱 협회 심판위원장에 임명되면서 부산 아마복싱 협회를 아우르고 있다.
내가보는 장상기 심판장은 친화력과 겸손함이 돋보이는 내면적 매력이 있는 인물이다. 오만함은 금방 사그러드는 비누방울 같은 것을 알기에 그는 낮춤의 미학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일까? 그의 주변에는 유명우·이상호등 많은 복싱인들과도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지낸다.
현재 부산시 복싱협회 조수연(68년 부산) 회장에게 심판장 장상기는 그분이란 극존칭을 쓰면서 "개인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물심양면으로 부산복싱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회장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조수연회장을 중심으로 부산 복싱인이 대동단결하여 현재 중위권에 맴도는 부산 복싱을 향후 중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책무를 실현하겠다"고 말한다...부산복싱의 건승을 바란다.